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프랑크 (문단 편집) == 폴란드 총독 시절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프랑크와 베커.jpg|width=100%]]}}} || ||<#ddd> 한스 프랑크 총독과 [[헤르베르트 베커]][* [[슈츠슈타펠|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으로 [[크라쿠프]]의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를 지냈다.] 장군 ||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프랑크는 중위로서 [[독일 국방군|독일 육군]]에 입대했다. 폴란드가 점령된 후 1939년 10월 10일에 히틀러는 프랑크를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했다. 전후의 폴란드는 동부를 소련이 지배하고 중앙 및 서부를 독일이 지배했다. 이 중 서부는 독일에 병합되어 중앙부만 폴란드 총독부령이 되었다. 총독부령은 폴란드의 약 40%에 해당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이었지만 권한 일부는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공유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친위대가 가진 [[게슈타포]]와 강제 수용소 등의 탄압적인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는 [[크라쿠프]]의 바벨 성에서 폴란드 총독부령을 통치했다. 그러나 프랑크는 폴란드를 야만의 땅이라 부르면서 경멸했다. 폴란드는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는 땅일 뿐이라는 뜻이었고, 그런 노예들에게 토지와 미술품은 필요없다면서 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이 나치 친위대에 의해 살해되고 보물들은 프랑크의 성으로 이동하여 사유재산이 되었다. 총독부령 내의 유대인을 게토로 수용하고 친위대에 의한 절멸수용소 이송을 허락한 프랑크는 1941년 12월 16일 연설에서 '''“유대인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무가치한 존재다. 그들은 분명히 박멸해야 할 존재이며 그렇게 해야만 제국 전체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35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총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제국이 검토 중인 [[아우슈비츠|대대적인]] [[치클론 B|방법]]을 조합한다면 녀석들을 말살할 수 있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프랑크 자신은 날이면 날마다 연회를 신나게 열고 즐겼다. 그의 통치는 완전한 전제군주와 같아서 [[나치당]]의 회계사인 [[프란츠 슈바르츠]]는 폴란드를 '프랑크의 왕국'이라 불렀다.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프랑크는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한다"''' 라고 비유했을 정도였다. 프랑크는 자신이 히틀러로부터 임명되고 폴란드가 자신의 사유지란 점, 누구도 히틀러 외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친위대는 프랑크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 결국 힘러와 갈등이 생겼고 힘러는 프랑크와 그의 아내가 저지른 불법 행위들을 파악하여 이를 빌미로 협박을 했다. 원래 권력투쟁에 약했던 프랑크는 신경쇠약 일보직전까지 몰렸으며, 그의 아내는 지친 나머지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프랑크는 아내가 간 곳에까지 약탈한 미술품들과 약탈품을 보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자리를 사임하려고 하여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던 [[빌헬름 카이텔]] 원수에게 자신을 병역 대상자로 넣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카이텔은 히틀러에게 이를 말했지만 히틀러가 거부하여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42년 6월에 독일로 돌아온 프랑크는 독일 법률학회에서 힘러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인지 게슈타포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 이에 놀란 히틀러는 프랑크를 소환하였고 프랑크가 폴란드 이외의 지역에서 연설하는 것을 금지시키며 폴란드에서의 연설도 당의 방침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프랑크는 나치당의 법무부장 및 법률학회 회장, 국가 판무관 자리를 내놓아야 했지만 폴란드 총독 자리는 유지했다. 그 후, 프랑크는 힘러에게 힘을 빼앗기고 친위대가 유대인에 대한 이송을 관할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프랑크는 자포자기했는지 전황이 악화되어 감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정치에는 손을 떼고 취미인 피아노 연주와 소설에 매달리며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1945년 1월에 폴란드를 압박해오자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루벤스]] 등의 미술 작품을 가지고 전용열차로 탈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